Sunday, December 31, 2023

Whispers of the Ancient Grove #31

Whispers of the Ancient Grove In the heart of an emerald grove, where whispers wind, Under the canopy, secrets of ages, entwined. Sunbeams dance through leaves, in playful delight, Casting mosaics of light, a mesmerizing sight. Majestic trees stand tall, guardians old and wise, Their roots deep in lore, beneath the earth they rise. Each leaf, a story; each branch, a memory's hold, In the forest's embrace, tales of yore unfold. A brook meanders, a silvery thread, through the glen, Its melody, a symphony of nature's hidden den. Dragonflies ballet over waters, shimmering blue, Mirroring skies, in a dance of morning dew. Birds serenade the dawn, in chorus clear and bright, Their songs weaving spells, in the first blush of light. Flowers bloom, a tapestry of colors bold and fair, Fragrances sweet, drift on the gentle air. In this ancient grove, time stands serene, A realm untouched, a world unseen. Here, the spirit roams, free and unconfined, In the whispers of the grove, peace we find.

Thursday, December 28, 2023

"Holy Innocents' Day: A Tale of Two Traditions"

"Holy Innocents' Day, marked by Western churches on December 28 and Eastern churches on December 29, commemorates the tragic event described in Matthew 2:16, where young male children in Bethlehem were executed. This day venerates these children as martyrs and Saints of God within the Church. The observance of this day dates back to at least the fifth century, signifying its longstanding historical roots. Despite its significant place in Christian liturgy, the recognition and manner of observing Holy Innocents' Day have shifted remarkably over time and across various cultures. In some regions and eras, it has been a solemn day of mourning, while in others, it has evolved into a day for pranks and childlike jest, reflecting a broader spectrum of cultural adaptations and interpretations. This variability in observance underscores the complex dynamics of how religious days are perceived and commemorated, adapting to the changing cultural and historical landscapes." -Pastor Steven G. Lee (December 28, 2023)

Tuesday, December 12, 2023

Guided by Truth's Radiant Gleam

Guided by Truth's Radiant Gleam In shadows' embrace, Guided by truth's radiant gleam, Question not your destined course. For in query’s chasm, Darkness splits the soul's force, Halting steps on doubt's sharp seam. Shed the armor of your fears, Or be lost in skepticism's tide, Where blood rivers weave their tears, And certainty is denied. Break free from the endless spin, The mad dance of night's cruel whim. Those once veiled in night's domain, Now seek life’s luminous flight, Carving a trail where none remain, In chariots bound for light’s bright gate. Eyes, once cloaked in night's refrain,
Awaken to dawn’s first sight. In a world newborn from strife, In simplicity's cradle, life stirs. The harbinger of a new chapter, A beacon in time's endless verse. Yesterday, today, tomorrow's keeper, In this journey, you are the reaper. Yet beware the crown's deceit, Whispering falsehoods in the wind. “Seek the child, pure and meek, Return with news of where he's been, That I, too, may come and greet." So speaks the night, clothed in sin. -Written by Steven G. Lee (December 11, 2023) The poem above was inspired by Matthew 2:2.

Sunday, December 10, 2023

Embrace Yourself with Love

Embrace Yourself with Love In the garden of your soul, where feelings grow, Tend to every bloom, let self-love flow. In this nurturing, does awareness glow, A beacon within, in steady tow? Imagine then, this love's warm embrace, Reaching out, touching another's face. If every heart were so enlaced, Wouldn’t mental storms leave without a trace? For at the core of human strife, Is the neglect of one's own life. "I love others, yet forget my own," A silent whisper in the bone. Ancient words, like rivers, run clear, "Love thy neighbor," we're meant to hear. Yet a greater challenge, scriptures pose: To love our foes, and peace compose. In this quest, humanity's test unfurls, A journey to be our best in this world. To love like this, with self and foe, Is the bravest path we ever hoe. -Written by Steven G. Lee (December 10, 2023)

방편과 방법에 관하여

방편은 인간 생존의 본질적 내용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방편의 의도와 내용이 없이는 방법이 시공에 적합할 수 없다. 방편의 등장이 있어야지 방법의 출현이 가능하다. 방편이 존재하지 않는 방법이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방편은 방법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THE FOUNTAINHEAD OF GENESIS

성경의 창세기는 인간인식의 창문을 열기 위해 설정된 가정을 전제로한다인간인식의 가정이란 시간과 공간의 의미와 감각적으로 보이는 세계에 대한 존재의미와 인간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의문에 대한 해답을 부여하기 위하여그에 대한 가정의 세계를 설정하지 않으면 안된다가정의 세계에 대한 전제는 인간인식에 작용하는 주관적 세계에 대한 가능성과 그 대상으로서의 객관적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궁구함으써 전개된다원인과 결과의 관계와 작용을궁극적 의문의 틀로 삼아 주관과 객관의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 假定한 세계에 대한 구조를 틀로 삼아 주객의 관계를 관찰하는 것이다이것은 의식의 발상이 되는 기본적인 구조가 인과관계가 기축이 되는 것이아니라설정된 가정의 씨나리오 자체가 기본적인 축이 되는 관찰방식을 말한다이러한 창세기의 가정을 전제로한 인식구조는 서구문명의 전개방식과 그 해석에 결정적 핵심이 되는 사유의 축이 된다동서양의 사유의 전개와 기술방식의 근본적인 차이점은동양은 인과 因관계를 기축으로 하나서양은 가정의 설정을 기축으로 하여 인식의 발상을 전개한다 가정의 세계에 대한 사유방식은 주관적인 관점을 보편적이고 객관적인사실로 전개시키는 촉매가 되었고인과관계를 중시하는 사유방식은 객관적인 현상을 주관적인 인식의 세계로 전환시켜 탐구하는 사유방식을 발전시키는 촉매가 되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주관적인 환幻의 세계에서 출현한 개념이다 . 주관적인 <>의 세계에 객관성을 부여하여 사실화 시키는 작업과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인과관계>를 주관적인 인식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작업은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를 관찰하는 의도와 전개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가정의 세계를 객관적 세계로 </>하는 작업과, 인과적인 객관적 세계를
주관적 세계로 </>하는 작업은, 사물을 <觀察>하는 사유의 틀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주객의 대립으로 인한 어떤 현상이나 작용에 대한 기술방식 뿐만이
아니라, 동일하게 기술된 내용을 해석하는 작업도 각기 다른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의 세계><인과의 세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것은 설정해 놓은 가정을 증명해 나가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방법론이 인과론적이기
때문이다그. 그러나 <인과의 세계>에서는 가정은 인식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설정한 가정은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
인과론적인 과정을 취한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타탕성을 확장시켜 나가는
모든 과정에서 가정의 세계는 인과론적인 해석을 방편으로 삼는다.
그러면 인과론적인 해석과 전개방식을 누가 취하느냐? 신의 계시를 받아서 인간이
그 뜻을 성취한다는 형식을 취한다. 神政(신정)사회의 등장은 神을 인간의식의 중심에
두고나서야 비로소 가능하다. 신이 만물을 만물을 창조했다는 가설은 이런 점에서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존재의미를 부여하여
이해할 수 있는 방도를 제공할 수 있게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의식의 발상도
가정이라는 구조안에서 이루어지는 확신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신적인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창세기의 기술방식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내용이
될 수 밖에 없다. ()을 유일 신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다신(多神)으로 볼
것인가? 유일 신으로 볼 경우에는 사물의 존재의 의미가 하나의 중심으로 강화되지만,
다신적인 존재로 볼 경우에는 사물의 존재의미가 분산되고 약소화 된다.
아브라함이 <유일신>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은 그의 유목민으로서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농경사회에 정착하여 사는 자들은 지역마다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있었
음으로 아브라함의 유목생활은 여러 지방신들을 섬기는 족속들과 접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목자들이 다신을 섬기게 되면, 지역신들의 거주민들과
함께 정착하기를 원하게 됨으로, 아브라함의 <유일신><->의 탄생은 지역신의
한계와 정착성을 탈피하여 유목민의 신이 된 것이다. 결국 그의 다신교적 경험과
목초를 찾아서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유목민으로서의 경험이 아브라함에게 <유일
>을 섬기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목민의 생활습성은 수렵민들의
삶의 스타일과 유사한 점이 많다. 농경민처럼 일정한 장소에 장기적으로 정착할 수
없음으로 땅의 소유와 경작을 중심으로 하여 정착하는 농민의 생활문화와 차이가
있다. 창세기가 기록된 시기는 소수의 유목민들이 지역적으로 정착된 농민들의
틈바구니에서 신진세력으로 힘차게 등장하는 때였다.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과
-브의 이야기는 자연에서 필요한 음식을 채취하여 생활하던 모계사회를 배경으로
하지만, 그들의 두 아들은 하나는 농사를 짓는 <->이요, 다른 하나는 목양을 하는
<->이다. 농사를 짓는자가 양치는 자를 살해하였다는 것은, 신에게 바치는
<제사>문제와 관련하여 심각한 갈등구조를 노출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
구조가 생기게 된 근본원인은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고 남자에게도 그것을 주었다는
것을 문제 삼는다. 이는 여성(女性)과 여권(女權)에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남성(男性)에게도 죄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고 지적함로서 여성 중심적인 부부관계의
문제점을 등장시켜 , 남성의 위치를 정립하려는 의도가 들어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전환하는 시기에 등장된 이야기일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긴장관계의 근본은 결국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남/녀의 </>의 영역으로부터의
분리로 인하여 야기된 문제라는 점을 두각시킴으로서, 남성과 여성의 대립적인 긴장관
계를 고조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이러한 긴장의 와중에서 태어난 아담의 후예들의
족보가 창세기 5장의 부권중심의 족보이다. 여기에는 단 한 명의 여성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생존수명도 점진적으로 단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권중심의 사회구조에서는 남성의 혈통을 잇는 것이 중요한 사안이지만, 모권중심의
사회에서는 남성의 혈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성의 생산력이 중요시 된다.
모권중심의 사회에서는 일모다부(一母多夫)의 모계중심 구조가 형성되지만, 부권중심
의 사회는 일부다처(一夫多妻)의 부권중심의 가족구조가 형성된다. 모계사회에서는
다신(多神)이 중심을 이루었지만은, 부계사회로 전환되면서 유일신(唯一神)적인
가부장적 구조가 힘을 얻게 되면서, 유목민족의 가치관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신()이 대치된 것은 부계사회의 중심에서
자연스럽게 이를 대치할 수 있게된 것이다. 육신을 가진 현실의 아버지와 하늘에
계신 보이지 않는 아버지()이 공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일신 민족이 이방여인을
거부하는 현상은, 이방 여인들이 섬기는 다신(多神)들이 유일신을 믿는 민족에 들어와
그들 간에 대립과 분파를 유발하고, 그들의 후손들과의 유대관계에 분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열현상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창세기는 그 근원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아담과 이브의 에덴 동산에서의 선악과 사건과 연계시킬 수
있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하나님으로 부터의 분리를 선악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계시킴으로서 인간의 죄()의 근본문제로 대두시킨 것이다. 아담과 이브의
신과의 분리는 그들의 두 아들에게 그대로 나타나서, 형제인 카-인과 아벨의 대립과
분쟁으로 이어져 형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사건으로 비약된다. 신과의 분리는
자신과 형제간의 분리현상으로까지 진전된 것이다. 신구약의 모든 문제는
신과 인간에 대한 죄성(罪性)을 원인으로 하여 그에 대한 결과와 심판과 예언의
성취에 촛점이 맞추어 진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죄의 현상에 대한
정죄가 문제가 되는데, 인간에 대한 정죄의 권한이 신()에게 달렸음으로, 이에
대한 인간의 입지가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노-아(Noah)의 이야기는 죄의 문제와 인간의 입지가 어떠한 반응의 
구조를 갖고 있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죄에 대한 심판은 신(神)이 내리지만은 심판에
대한 반응은 전적으로 인간의 선택에 달려있다. 노-아의 방주건설 작업과 그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은 상반적이다.  그리고 각 종 동물들에 대한 구출작업도 노-아의 손에 
달려있다.  신은 구원을 위한 작업을 명령하는 존재요, 신의 명령을 신뢰하는 노-아는 
그의 명령대로 실행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이러한 구조하에서는 신(神)과 명령을 따라야 하는
인간, 그리고 구원의 대상이 삼각관계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런 삼각관계를 유지시키는 오직 
유일한 길은 신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유일신(唯一神)을 섬기는 명령체계는 다신(多神)을 섬기는 명령체계와 근본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다.  
유일체제의 기록은 "신(神)이 말씀했다"고 하면 되지만, 다신체계에서의 기록은 그런 신(神)들의 
이름을 밝혀야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누가 어떤 신(神)에게서 어떠한 말씀을 들었는지 일일이 
기록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들었다"고 하는 기록을 남겨야 한다.  만약, 신(神)에게서
들은 어떤 말씀에 잘못 기록된 점이 있다면, 그 책임은 그 말씀을 기록한 자에게 있는 것이지 
신(神)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유일신체제의 기록은 저자가 "신이 말씀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신의 말씀"이 오직 유일한 권위를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권위는 그런 말을 하거나 
그런 기록을 남긴 자에게 절대적인 신적안목이 있음을 인정하고 믿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오늘날 중앙집권적 권력체제는 유일신 사상에서 그 근본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 노-아의 각 종 동물의 나포능력과 거대한 방주의 건설능력 및 조류를 사용한 정보수집 
        능력 등등은 노-아의 이야기가 쓰여진 연대의 배경이 어떠한 시대의 상황인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

죄에 대한 용서의 문제도 <유일신>의 입장과 <다신>의 입장이 같을 수 없다. 
<유일신>의 입장은 획일적인 용서가 가능하지만, <다신>의 입장은 죄에 대한 용서가 다양해 질 수 
밖에 없다.  예를 든다면 <홍해>바다를 누가 갈라 놓았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말할 때에도 다신적인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의견이 분분해 질 것이지만은, <유일신>적인 견해에서는 획일적인 입장이 중심이 
된다. <노-아>의 홍수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될 것이다.  인간의 죄악 때문에 온 세상이 
물로 셰례를 받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물고기와 물짐승들만 살아 남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노-아의 
이야기는 죄로 부터의 구원에 대한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그래서 인간 구원의 방법을 강구한 것이 
<노-아>의 가족이다. 그리고 이 가족을 통하여 뭍에서 숨쉬는 생명들 또한 살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왜 <부정한 짐승>들의 암/수 한 쌍씩의 생명을 살리라고 노-아에게 신(神)이 명령했느냐
하는 점이다.  아마 여기에는 땅에서 숨쉬는 각종 뱀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신(神)의 섭리가 비밀스러운 것이기는 하나, 언제나 한결같은 입장이다.
에덴 동산에 사람과 뱀을 같이 살게 하였고,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할 것을 
함께 자라게 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분별하게 하였다. 상대적으로 대립하는 존재들을 
낙원에서도 함께 살도록 하여 인간이 그 가운데서 살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거대한 방주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선기술과 각종 야생짐승들을 산 채로 포획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준의 사회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에, <깨끗한 짐승들>외에 
<부정한 짐승들>까지도 구조해야 한다는 의식수준은 상당히 고차원적인 인지능력이 노-아에게 
있었음을 통찰할 수 있게한다. 그리고 그러한 통찰력은 <깨끗한 짐승>을 신에게 제사드려야 한다는
의례규칙을 설정해야 한다는 동기를 부여한다. 이것도 물론 아브라함처럼 깨끗한 짐승을 죽여 불에 
태우는 희생제단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 창세기 8:20-22 ).


노아는 의인인가?
창세기의 저자가 아브라함을 신의 이름으로 의인화 시킨 것과 같이, <노-아>도 신의 이름으로 
의인화 되었다.  이는 신의 이름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이다. 이 점을 제외한다면, 아브라함이나
노-아가 모두 죄인일 뿐이라는 암시가 포함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죄인이다. 노-아는 죄인이다.
그러므로 <신>이 이들과 맺은 약속은 모두 <죄인>들과 약속이란 점이 중요시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신>이 인간과 맺은 약속으로 인하여 모든 다른 생명들도 같은 약속하게 존재하게 된다. 

아담의 후손과 노-아의 후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우선, 아담의 족보와 노-아의 족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비교해 보면, 
노-아의 세대 이후에는 창세기 8:21-22의 세계가 설정( 인간과 신의 대립관계가 소멸 )되지만,
아담에서 노-아의 시대까지는 신과 인간의 관계는 대립과 심판의 관계( 노-아의 홍수)였다.
노아 홍수 이전의 족보를 대표하는 것은 성서의 기록으로는 카인의 족보(창 4:17-24)와 
아담의 족보(창 4:25-26; 5:1-32)로 갈라진다. 아담의 족보에는 후손들의 수명의 햇수가 기록되어 있으나 
카인의 족보에는 수명의 햇수에 대한 기록이 전혀없다. 카인의 족복에는 직업의 내용에 대한 기록이 
있으나, 아담의 족보에는 직업에 대한 기록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않다. 아담의 족보에는 여성의 이름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이브의 이름도 보이지 않는다 ), 카인의 족보에는 여성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 족보의 내용에 의미를 부여한다.  카인의 족보는 그의 아들 에녹(Enoch)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아담의 족보는 카인에게 살해당한 아-벨을 재생시킨 셋(Seth)으로부터 족보가 시작되어 노-아와 그의
세 아들( Shem, Ham, Japeth )로 마감된다.  그리고 노-아의 족보의 특수한 점은 신이 노-아의 홍수때에 
신의 심판으로 멸망되지 않고 살아 남은 자들의 후손에 대한 기록으로서 의롭게 여김을 받은 자들의 
족보라는 점이다. 더 나아가서는 이들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와 모든 민족 국가들의 조상이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아의 족보에는 아담의 족보에서처럼 수명의 햇수에 대한 기록이 전혀없다.  
왜 아담의 족보에만 후손들의 생존햇수가 기록되어 있을까 하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분명 거기에 있을 
것이다.